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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계약직

2012.03.16 17:11

바람 조회 수:45327



‘있다’의 반대말은? ‘없다’다.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가 아니라 ‘좋아하지 않는다’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걸까?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하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위 두 단어의 차이는 중간지대의 유무다. 중간지대가 없는 ‘있다’는 그 반대말인 ‘있지 않다’가 ‘없다’와 같은 의미지만 중간지대가 있는 ‘좋다’는 그 반대말인 ‘좋아하지 않는다’가 ‘싫다’와 다른 의미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비정규'라는 말 역시 '있다'라는 말처럼 중간지대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반대말은 ‘정규직 노동자’다. 같은 말로, 기간의 정함이 ‘있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의 반대말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다. 기간제 및 단시간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기간제법)도 이 점을 명확하게 하고 있다. 법 제4조 제2항은 “사용자가… 2년을 초과하여 기간제근로자로 사용하는 경우에는 그 기간제근로자는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로 본다”고 정하고 있다. 의미는 명확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2년 넘게 고용했다면 정규직 노동자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규직 노동자로 간주한다는 것은 처우나 노동조건도 정규직 노동자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한 그 뜻이 바로 이 규정의 의미다.

그런데 몇 년 전, 새로운 용어가 등장했다. ‘무기계약직’ 노동자! 기간의 제한이 없는 계약직 노동자라니! 그 자체로 말이 안 되는 이 용어가 어느 순간 계약직 노동자의 반대말이 되었다. 법원에서조차 무기계약이라는 용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한다. 심지어 이 용어를 기간제법 제4조 제2항에서 정한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으로 해석하고 있다. ‘무기계약’이라는 말의 뜻은 명확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2년 이상 일을 해도 근무기간만 제한이 없을 뿐 실제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규직 노동자 간에는 근무기간의 차이 외에도 급여나 노동조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규직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급여나 노동조건도 개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무기계약직 노동자로 취급하겠다는 것은 급여나 노동조건은 변화시키기 않겠다는, 즉 정규직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한다면 이것은 분명 법의 취지를 잠탈하는 것이고 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법행위를 처음으로 감행한 주체는 바로 공공부문이다. 그동안 공공부문은 상시적인 업무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용해 왔다. 그러다가 기간이라는 문제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 노동자로 전환해야 하자 2007년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이라면서 정규직 노동자의 처우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대책을 내놓았고, 아예 ‘무기계약 전환’을 제목에 명시했다. 최근에 전국여성노동조합과 함께 비정규직 조리사를 대리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차별 진정을 한 바 있다. 학교 급식 조리사는 기능직 공무원인 조리사와 비정규직 근로자인 조리사로 나뉘는데 이들 모두 하는 일은 동일하고 조리사라는 국가 공인 자격증을 소지해야 한다. 그런데 비정규직 근로자인 조리사의 경우 기능직 공무원인 조리사와 달리 방학, 토요일에는 급여를 받지 못한다. 실제 근무한 일수에 일당을 곱해서 계산한 돈을 임금으로 받는다. 기능직 공무원인 조리사와 달리 수당도 거의 없다. 특히 기능직 공무원인 조리사는 연차가 쌓일수록 호봉도, 임금도 올라가지만, 비정규직 조리사는 3년마다 월급이 1만 원씩 오를 뿐이다. 결국, 비정규직 조리사는 2년 이상 근무하더라도 기능직 공무원인 조리사가 될 수도 없고, 여전히 비정규직 조리사를 위해 별도로 만들어진 임금 기준과 근로조건에 맞춰 일해야 한다. 아무리 일을 오래 해도 경력이란 건 의미가 없다.

이처럼 공공부문에서 시작된 무기계약직 열풍은 사경제 부문으로까지 확대되었다. 회사는 점점 영리해져서 콜센터직원이나 은행 창구직원처럼 아예 비정규직 직군을 새로 만들거나, 기존의 정규직 아래 최하위 직급을 신설하고 비정규직 노동자를 여기에 편입시킨 후 기존 정규직 노동자와는 별도의 인사, 임금 체계를 운용함으로써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간제 근로자의 차별 문제를 다루는 노동위원회는, 정규직과 임금 기타 근로조건 등에서 차별이 존재하더라도 무기계약 노동자는 차별시정 신청을 할 수 없다고 일관되게 결정하고 있다.

어제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은 “무기계약직을 포함한 상용직의 비중이 꾸준히 커져 고용의 질이 개선됐다”고 이야기했다. 정부는 올해도 비정규직 대책이라면서 무기계약직 전환을 아주 자랑스럽게 떠들어댄다. 은행권에서는 고졸 행원을 뽑는 것을 마치 대단한 인사인 것처럼 홍보한다. 안타깝지만 고졸 행원은 절대 정규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의 속셈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도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이제는 아무리 노력해도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일하면 일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는 세상이 되었다. 무기계약직, 이대로 용인할 것인가, 아니면 원칙을 되찾을 것인가. 답은 분명하다. 


글_윤지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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